인천채씨의 시조(始祖)는 채선무(蔡先茂)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그는 고려(高麗)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되고 인천(仁川)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仁川)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단소(壇所)는 대구 도곡산에 있음.
그의 아들 신징(愼徵)이 나라에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고 손자(孫子) 보문(寶文)은 고려(高麗) 의종(毅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등을 지냈으며 학문(學問)이 뛰어나 문명을 날렸고 뒤에 추밀원사(樞密院事)·태자빈객(太子賓客)·지제고(知制誥)를 거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시조이하 9위 단소